시조 소개
“ 고령김씨 시조 소개 ”
득관조(得貫祖) 남득(南得)
초휘(初諱)는 기지(麒芝)이시고 공민왕(恭愍王)이 영남(嶺南)에서 얻은 귀한 신하라는 뜻으로, 사명(賜名)하여 남득(南得)으로 하시었다. 자(字)는 중서(重瑞)이시고 시호(諡號)는 충익(忠翊)이시고 충혜왕(忠惠王) 원년 경진년(庚辰年,1340년)에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시어 벼슬하시고 국내외에 출입하시니 명망(名望)이 높으셨다.
공민왕 십삼년(1364년 甲辰)에 덕흥군(德興君)이 공민왕을 내쫓고 왕이 되려는 음모로 최유(崔濡)를 앞세우고 원군(元軍) 만명으로 압록강을 건너서 쳐들어 왔으나 패하여 원(元)에 가서 다시 고려를 칠 것을 음모하니 원제(元帝)가 의심하고 어사(御使) 유인(紐隣)을 고려에 보내어 심문케 하였다.
공이 접반위시랑(接班尉侍郞)으로서 원사(元使)에게 최유(崔濡)의 매국적 묘사한 죄상(罪狀)을 통절히 알리니, 원사(元使)가 감오(感悟)하여 돌아가 원제(元帝)에게 아뢰니 원제(元帝)가 공(公)을 입원사은(入元謝恩)케 하고 공(公)의 정충(貞忠)을 가지(嘉之), 벼슬을 내려 금자광록대부이부상서겸시중평장사(金紫光祿大夫吏部尙書兼侍中平章事)로 하다.
고려에 환국하시니 왕(王)이 임진교외(臨津郊外)까지 친영(親迎)하고 책훈봉(策勳封)하여 평리익제공신 광정대부 판개성부사(評理翼載功臣 匡靖大夫 判開城府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하고 고령을 식읍(食邑)으로 하였다,
고양(高陽)은 고령의 별칭으로 인하여 후손이 고령을 관(貫)으로 하였다. 공(公)이 상주목사(尙州牧使) 재직 시에 풍여정(風詠亭)을 시창(始創)하시니 목은(牧隱) 이색(李穡)께서 기문(記文)하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께서 시(詩)를 지었다, 목은집 상주지(牧隱集 尙州誌)인용.
황해도 관찰사 재직 시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셨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가시다.
고려 말년에 포은(圃隱) 정몽주 등과 더불어 고려조를 보익(輔翼)하려고 충절(忠節)을 지키시다가 이태조가 개국하여 원지로 유배(流配)되시어 평생을 마치시다 (高麗史 太祖實錄)
초휘(初諱)는 기지(麒芝)이시고 공민왕(恭愍王)이 영남(嶺南)에서 얻은 귀한 신하라는 뜻으로, 사명(賜名)하여 남득(南得)으로 하시었다. 자(字)는 중서(重瑞)이시고 시호(諡號)는 충익(忠翊)이시고 충혜왕(忠惠王) 원년 경진년(庚辰年,1340년)에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시어 벼슬하시고 국내외에 출입하시니 명망(名望)이 높으셨다.
공민왕 십삼년(1364년 甲辰)에 덕흥군(德興君)이 공민왕을 내쫓고 왕이 되려는 음모로 최유(崔濡)를 앞세우고 원군(元軍) 만명으로 압록강을 건너서 쳐들어 왔으나 패하여 원(元)에 가서 다시 고려를 칠 것을 음모하니 원제(元帝)가 의심하고 어사(御使) 유인(紐隣)을 고려에 보내어 심문케 하였다.
공이 접반위시랑(接班尉侍郞)으로서 원사(元使)에게 최유(崔濡)의 매국적 묘사한 죄상(罪狀)을 통절히 알리니, 원사(元使)가 감오(感悟)하여 돌아가 원제(元帝)에게 아뢰니 원제(元帝)가 공(公)을 입원사은(入元謝恩)케 하고 공(公)의 정충(貞忠)을 가지(嘉之), 벼슬을 내려 금자광록대부이부상서겸시중평장사(金紫光祿大夫吏部尙書兼侍中平章事)로 하다.
고려에 환국하시니 왕(王)이 임진교외(臨津郊外)까지 친영(親迎)하고 책훈봉(策勳封)하여 평리익제공신 광정대부 판개성부사(評理翼載功臣 匡靖大夫 判開城府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하고 고령을 식읍(食邑)으로 하였다,
고양(高陽)은 고령의 별칭으로 인하여 후손이 고령을 관(貫)으로 하였다. 공(公)이 상주목사(尙州牧使) 재직 시에 풍여정(風詠亭)을 시창(始創)하시니 목은(牧隱) 이색(李穡)께서 기문(記文)하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께서 시(詩)를 지었다, 목은집 상주지(牧隱集 尙州誌)인용.
황해도 관찰사 재직 시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셨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가시다.
고려 말년에 포은(圃隱) 정몽주 등과 더불어 고려조를 보익(輔翼)하려고 충절(忠節)을 지키시다가 이태조가 개국하여 원지로 유배(流配)되시어 평생을 마치시다 (高麗史 太祖實錄)


